
AI-generated summary
1979년 석유 위기 대응을 위해 매봉산에 석유비축기지가 건설되었으며, 40년간 보안시설로 운영되다가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석유가 이전되고 방치되었다.
기름탱크가 전시·공연을 채운 '문화탱크'로 거듭나다
(서울=연합뉴스) 이동경 기자 = 서울월드컵경기장을 마주 보는 매봉산 자락에 6개의 거대한 원통형 구조물이 산에 파묻히듯 앉아있다.
이 구조물들은 한때 서울 시민 누구도 존재를 알지 못했던 1급 보안시설이었다. 그것은 바로 매봉산 남측 사면의 암반을 뚫어 1979년에 세운 석유비축기지, 즉 기름탱크였다.
그 기름탱크가 지금은 '문화탱크'가 됐다. 석유를 비축했던 곳이 '문화비축기지'가 된 것이다. 석유 대신 전시, 공연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채우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 보안시설에서 도시재생의 상징으로
문화비축기지의 시초는 1973년 중동전쟁이었다. 원유 수급 위기를 겪은 정부는 1979년 기름탱크를 지었다. 저장 용량은 6천907만ℓ. 서울 시민이 한 달 정도 쓸 수 있는 양이었다.
암반을 깎아낸 뒤 안에 탱크를 앉히고 콘크리트 옹벽으로 감쌌다. 유사시를 대비한 은폐와 방호가 목적이었다.
완공 이후 40여년간 일반인의 접근이 철저히 통제됐다. 인근 주민들조차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 변신의 계기는 월드컵
전환점은 2002년 한일월드컵이었다. 안전상의 이유로 월드컵을 앞두고 폐쇄되고 석유는 용인으로 옮겨졌다.
이후 10년 넘게 방치됐던 부지의 운명은 2013년 시민 아이디어 공모를 통해 거듭났다. '석유에서 문화로'라는 명료한 방향이 그때 세워졌고, 4년간의 재생 작업을 거쳐 2017년 9월 문화비축기지가 문을 열었다.
탱크를 모두 허무는 대신 최소한의 개조로 원형과 흔적을 살리고, 부지에 남아 있던 수림을 최대한 보존한 채 꽃과 나무를 더해 공원으로 조성했다.
◇ T1, 해체된 탱크가 유리공간으로
문화비축기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T0 문화마당이다. 평소에는 시민들의 쉼터지만 대규모 공연과 장터가 열릴 때마다 전혀 다른 얼굴이 된다.
광장을 지나 만나게 되는 탱크들의 지름은 15~35m, 높이는 13~15m 규모다. 휘발유를 보관했던 T1 파빌리온은 철제 탱크를 해체하고 유리 벽체와 지붕을 얹었다. 투명한 유리 벽체 너머로 40여년간 탱크를 둘러싸고 있던 매봉산 암반이 눈앞에 거실처럼 펼쳐진다.
옹벽과 유리 사이의 1.5m 간극은 자연광을 지하 바닥까지 끌어들이는 채광창 역할을 한다. T1은 전시와 워크숍, 공연이 열리는 다목적 공간으로 쓰인다. 유리벽에는 새들이 부딪히지 않도록 독수리 그림이 그려져 있다.
◇ T2, 탱크를 비운 공연장
T1이 기존 탱크를 철거하고 유리를 통해 개방감을 부여했다면, 경유를 담았던 T2는 탱크를 비워냄으로써 새로운 공간을 창출했다. 탱크 상부는 지붕을 씌우지 않고 하늘을 향해 활짝 열어뒀다.
매봉산 암벽과 탱크를 감싼 콘크리트 옹벽이 자연스러운 울림통 역할을 해 하늘과 바람과 산이 그대로 공연의 일부가 된다.
탱크 하부는 실내 공연장으로 마련돼 계절과 날씨에 관계없이 이용할 수 있다. 야외무대에는 탱크를 가리던 옹벽이 무대 후면벽으로 웅장하게 서 있다. 이 무대에서는 어쿠스틱·락 페스티벌, 테슬라 사이버트럭 론칭쇼, 프라다 패션쇼도 열렸다.
T2 뒤편 산 위에 유리로 된 건물에는 한때 유명 연예인의 호화 저택이 있었단다.
◇ T3, 원형 그대로 보존
서울미래문화유산으로 지정된 T3는 석유비축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탱크다. 내부 진입이 제한됐지만, 가장 깊은 인상을 주는 곳이다.
자물쇠가 채워진 철문 사이로 보이는 녹슨 탱크의 표면과 두꺼운 옹벽이 그 시절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전한다. 문화비축기지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스스로 증언하는듯하다.
탱크를 오르내리던 철제 계단, 유류양을 측정하는 계측기, 파이프라인 등 모든 설비가 변형되지 않고 남겨져 있다. 철문 안쪽에 '기억 안내판'이라고 쓰인 투명 플라스틱판이 눈에 띈다.
당시 매일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던 탱크 관리자들이 '겨울에 눈이 오면 발판이 얼마나 미끄러울까. 그렇다고 기름탱크인데 불로 녹일 수도 없지. 사고 나면 큰일 난다'는 등의 걱정스러운 속마음을 드러낸 글이 쓰여있다.
◇ T4, 밀폐된 내부의 신비감
등유를 보관하던 가장 큰 규모의 T4는 창문이 전혀 없이 밀폐된 탱크 내부를 그대로 살렸다. 소리가 7초간이나 반사되는 울림 현상을 건축 단점이 아닌 공간 특성으로 내세운다. 내부에는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는 21개의 기둥이 있다. 마치 거대한 악기 내부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아~' 소리를 내보고 시간을 재본다. 진짜 7초간 소리가 울린다. 기둥 사이로 런웨이를 조성한 패션쇼가 연출되는가 하면, 울림을 활용한 클래식 공연장으로도 활용된다. 복합문화공간이다. 옹벽 사이의 갈라진 틈으로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며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다.
◇ T5, 서사가 응축된 전시실
T5 이야기관의 둥근 전시실을 한 바퀴 돌면 석유비축기지가 문화탱크가 되기까지의 크고 작은 이야기를 차례로 따라갈 수 있다. 당시 관리 직원들이 쓰던 헬멧과 작업복 같은 실물 자료가 전시돼 있다.
탱크의 강철 벽면 일부를 과감하게 잘라내 탱크 내외부를 오가며 전시를 관람할 수 있게 했다. 지난 4~7월 T4와 T5에서는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공식 디지털 전시 '찬란한 에르미타주'가 국내 최초로 열리기도 했다.
◇ T6, 사라진 탱크의 재생
T6 커뮤니티센터는 유일하게 새로 지은 건물이다. 외벽과 내벽을 감싸는 거칠고 녹슨 철판들은 T1과 T2를 해체할 때 나온 것들이다. 사라진 탱크의 몸이 새 건물의 외피가 된 셈이다. 재생이라는 이 공간의 주제를 가장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구조물이다.
창의랩, 강의실, 회의실, 카페테리아가 들어서 있고 2층으로 올라가면 하늘을 둥그렇게 올려다볼 수 있는 옥상 마루가 기다린다. 일반에 무상으로 개방되는 옥상 마루에서는 밤에 아이들이 와서 별도 관찰할 수 있다.
◇ 문화비축기지, 그 역설적 전환
기름을 감추던 탱크가 사람들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다. 무엇을 숨기던 자리에 모든 것을 나누는 자리가 들어서 있다. 그 역설적인 전환이야말로, 문화비축기지를 서울의 여느 문화공간과 구별 짓는 가장 큰 이유가 될듯하다. 국내 도시재생 사례 가운데에서 상징적인 성공 모델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6년 10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AI outlook — possibilities, not f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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