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창작희곡 공모 대상작 '역행기'의 성취와 한계
신화와 현실의 확장 돋보이지만 텍스트 의존성 아쉬워
Quick Look
국립극단 창작희곡 공모 재개 후 첫 대상작인 연극 '역행기'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수메르 신화를 차용해 개인의 고통을 세대와 땅의 기억으로 확장한 상상력이 돋보이나, 무대 언어로의 전환 과정에서 텍스트와 연출의 과도한 의존성이 한계로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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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It Matters
국립극단 창작희곡 공모가 15년 만에 재개된 후 선정된 첫 대상작인 연극 '역행기'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국립극단의 연극 '역행기'(김주희 작, 신재훈 연출)는 2024년 국립극단 창작희곡 공모 대상작이다. 공모에 선정된 뒤 작품개발과 낭독공연을 거쳐 본공연에 이르기까지 약 2년이 걸렸다.
국립극단 창작희곡 공모는 1957년 시작돼 하유상의 '딸들, 연애 자유를 구가하다', 이용찬의 '가족', 천승세의 '만선' 등을 발굴했으며, 중단 이후 15년 만인 2024년에 재개됐다. 희곡을 선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개발과 낭독공연을 거쳐 본공연으로 이어가는 체계를 갖췄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2024년 공모에는 303편이 접수됐고, 심사위원들은 '역행기'가 지닌 상상적 공간의 스케일과 주제의 다층성을 높이 평가했다. 지난해 150분의 낭독공연을 거친 이 작품은 올해 200분 분량의 본공연으로 완성됐다. 그런 점에서 '역행기'는 재개된 공모의 대상작이 '선정―개발―낭독―본공연'이라는 단계를 온전히 통과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작품은 철거를 앞둔 어느 집에서 시작한다. 집이 무너지는 동안 죽음을 시도했다 실패한 인안나는 바닥 아래 세계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주머니와 핑크, 에레쉬, 돌덩이를 차례로 만나면서, 이 낯선 존재가 자기 할머니와 언니, 어머니, 그리고 더 오래된 가족의 기억과 연결돼 있음을 알아간다.
작품의 모티프는 수메르 신화 속 '인안나의 명계 하강'이다. 다만 이 작품에서 신화는 현실에서 시선을 돌리게 하는 장치라기보다, 현실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통로에 가깝다.
현재의 인안나만 바라본다면 그의 고립과 좌절은 한 개인의 실패나 심리적 문제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인안나가 현실의 바닥 아래로 내려가면서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여성들이 하나의 공간에서 만난다. 신화가 현실의 시간과 공간을 풀어놓는 순간, 오히려 현실에서는 조각조각 끊어져 있던 삶의 인과와 축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개인의 고통은 할머니와 어머니, 언니의 노동과 상처를 통과하며 세대의 문제로 확장되고, 다시 여성의 노동과 가족, 개발과 훼손된 땅의 문제로 이어진다. 작가가 훼손되는 땅 아래 쌓인 이야기와 '뒤편에 서 있었던 이들의 바닥'을 만나고 싶었다고 밝힌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박동우가 만든 무대는 이러한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상당한 힘을 발휘한다. 무너지는 방에 홀로 앉아 있는 인안나의 작은 공간을 제외하고, 무대 바닥 전체가 거대한 구조물처럼 들어 올려진다. 드러난 바닥의 아랫면에 영상이 겹치면서 무대는 순식간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하 세계로 뒤바뀐다. 현실의 바닥을 들어 올려 그 아래 감춰진 세계를 보여준다는 작품의 발상이 압도적인 이미지로 구현된 순간이다.
작가가 등장인물의 몸을 기억의 저장소처럼 설정한 대목도 흥미롭다. 에레쉬의 팔과 날개, 돌덩이의 몸, 인안나의 발과 뿌리에는 각 세대가 지나온 노동과 상처가 새겨져 있다. 기억이 언어로만 전승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남고 다음 몸으로 이어진다는 발상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마지막에 인안나가 바닥을 벗어나 자기 뿌리를 딛고 걷는 장면에 힘을 싣는다.
그러나 공연을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질문이 반복해서 떠오른다. 희곡이 가진 풍부한 언어와 상상력이 과연 얼마나 효과적으로 '무대의 언어'로 전환됐는가 하는 문제다.
배우들은 일정한 패턴의 생경한 움직임을 반복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지하 세계의 비현실성을 빚어내는 데는 기여하지만, 3시간이 넘는 공연 내내 대사와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못한 채 하나의 연출적 형식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특정한 몸짓이 인물의 상태나 관계, 사건의 변화와 연결되지 못하면서, 추상적이고 시적인 언어를 이해하는 데 오히려 또 하나의 장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가장 논쟁적인 존재는 화자 '둡'이다. '둡'은 서판을 뜻한다. 작가는 희곡 전체를 둡으로부터 발화되는 일종의 기록물로 설정했다. 둡은 인안나의 하강과 귀환을 따라가며 사라질 기억을 기록하고,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를 연상시키듯 극의 상황과 진행을 지속해 설명한다.
문제는 둡이 기억의 기록자를 넘어 등장인물의 행동까지 상당 부분을 설명한다는 데 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다가가고, 바라보고, 망치를 들고, 뿌리를 자르는 과정이 둡의 언어를 통해 전달된다. 둡이 이러한 행동과 상황을 설명할 때, 정작 해당 배우들은 정지해 있거나 특정 동작만 반복하기도 한다.
말과 행동이 그대로 겹치는 과잉을 피하고 희곡에 쓰인 둡의 언어를 보존하려 한 연출적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배우의 몸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건과 상황까지 언어에 의존하게 되면서, 관객은 눈앞에서 사건을 느끼기보다 그것을 설명으로 이해하게 된다.
특히 '역행기'가 몸과 노동, 상처의 기억을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이는 더 역설적이다. 배우의 몸에 세대의 기억을 새겨놓았으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몸보다 텍스트를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움직임과 둡의 내레이션은 서로 다른 연출 장치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문제로 수렴한다. 배우의 몸이 사건을 만들어내기보다 텍스트를 전달하는 수단에 머물면서, 무대의 생명력은 오히려 약화했다.
둡이 반복해서 발화하는 의성어 '사락'에서도 같은 문제가 드러난다. 작가는 대본에서 이를 '가볍게 쓸리거나 맞닿는 소리이자 침묵을 표기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무대에서 침묵마저 '사락'이라는 말로 발화되면서, 관객은 침묵을 경험하기보다 침묵이 존재한다는 설명을 듣게 된다. 적힌 단어 그대로 전달하는 대신 배우의 호흡과 정적, 혹은 다른 감각적 기호를 사용했다면, 작가가 의도한 침묵은 관객에게 훨씬 다양한 경험과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았을 것이다.
결국 '역행기'의 성취와 한계는 같은 곳에서 출발한다.
신화와 현실을 겹쳐 개인의 상처를 가족과 여성의 노동, 세대와 땅의 기억으로 확장한 희곡의 상상력은 이 작품이 지닌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그러나 공연은 그 풍부한 텍스트를 충실하게 보존하려 한 나머지, 희곡이 무대 위에서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끌어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문학 장르와 구별되는 희곡의 생명력을 믿고, 배우의 몸과 공간, 침묵, 그리고 그 안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아내는 관객을 조금 더 신뢰했다면 '역행기'의 세계는 오히려 더 넓고 깊게 펼쳐졌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행기'는 한 작품의 성패를 넘어, 희곡 공모의 작품 개발 방식까지 돌아보게 한다.
해외의 주요 신작 개발 프로그램도 좋은 작품을 '선정하는 일' 못지않게 이후의 개발 과정에 큰 비중을 둔다. 미국 유진 오닐 시어터 센터의 전국 극작가 콘퍼런스는 신작을 선정한 뒤 연출가와 드라마터그, 배우가 참여하는 워크숍과 공개 리딩을 거치며 작가가 작품을 계속 수정할 수 있도록 한다. 영국 소호 시어터 역시 초고를 실제 공연할 수 있는 희곡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극장팀과 외부 드라마터그가 참여하는 장기 작품개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좋은 희곡이 곧 좋은 공연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텍스트가 무대의 언어로 다시 태어나기까지는 또 하나의 창작 과정이 필요하다.
작가와 작품을 존중한다는 것은 희곡의 문장을 가능한 한 그대로 지키려는 노력일까, 아니면 텍스트가 무대에서 새롭게 변형될 수 있도록 실험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열어두는 것일까. 그 과정에서 작가와 연출가가 어디까지 텍스트를 지키고 어디서부터 무대의 자율성을 발휘할 것인지도 중요하다. 15년 만에 재개된 국립극단 창작희곡 공모의 첫 대상작 '역행기'가 남긴 숙제다.
'역행기'에 이어 2025년 국립극단 창작희곡 공모에서는 이용훈의 '모노텔'이 대상을 받았다. '모노텔' 역시 작품개발 과정을 거쳐 2027년 본공연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립극단의 창작희곡 공모는 문학상 시상에 그치지 않고 희곡을 실제 무대로 완성해가는 제도인 만큼, 좋은 텍스트를 좋은 무대로 전환하기 위한 작품개발 방식에 대한 고민도 함께 깊어져야 할 것이다.
Open Questions
- 향후 국립극단 공모작들의 작품 개발 체계가 어떻게 개선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