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 공익소송서 시민 눈물 닦아준 '강골' 공학자, 2월 타계
향년 96세, 망원동 수재 소송 감정 결과로 시민 승소 판결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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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공익소송인 망원동 수재 소송에서 서울시 책임을 입증하는 감정 결과를 제출해 시민 승소 판결을 도운 심강 이원환 연세대 토목공학과 명예교수가 2월 19일 향년 96세로 별세했다. 제자 조원철 연세대 명예교수 등이 5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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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환 교수는 1985년 망원동 수재 소송에서 재판부의 의뢰를 받아 감정 결과를 제출했으며, 이는 서울시의 책임을 인정받아 원고 승소 판결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한국 최초의 공익소송이자 최초의 집단소송, 최초의 기획 소송으로 기록된다.
국내 최초 공익소송에서 서울시의 책임을 지적한 감정 결과로 시민 승소 판결을 도운 심강(心江) 이원환(李元煥) 연세대 토목공학과 명예교수가 올해 2월 19일 세상을 떠났다고 제자인 조원철 연세대 명예교수 등이 5일 전했다. 향년 만 96세.
1929년 11월 20일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토목공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를 모두 마쳤다. 경기공고(현 서울과학기술대) 토목 교사이던 1956년 12월 국내 최초의 수리실험실을 설치했다. 부산대 조교수를 거쳐 연세대 토목공학과 강단에 섰다. 연세대 산업기술연구소장과 산업대학원장, 한국수문(水文)학회(현 한국수자원학회) 회장, 한국물학술단체연합회 초대 회장,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이사장을 지냈고,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이었다.
제자 조 교수는 고인의 학술적 업적으로 '단시간 확률강우강도식(IDF curve formula)'을 만든 점을 꼽았다. 시간당 강우량 자료를 기초로 하수도 등의 적당한 강도를 계산해내는 공식이다. 조 교수는 "고인이 만든 확률강우강도식을 바탕으로 '서울시 하수관거 설계기준'을 만들었다"며 "각 기상관측소에 보관 중인 강우 자기 기록지를 복사하려고 (아직 복사기가 없을 때) 대형 청사진기를 트럭에 싣고 다니며 시간당 강우량 자료를 수집한 결과였다"고 설명했다. 하천공학, 수력발전공학, 수문학 서적을 다수 집필했다.
망원동 수재 소송에선 1985년 4월 25일 재판부(서울민사지법 14부) 의뢰를 받아 같은 해 7월 20일 감정 결과를 제출했다. 1심 판결 재판장은 신명균 부장판사였지만, 감정 결과를 제출할 때까지는 김성만 부장판사가 재판장이었다.
소송의 배경은 1984년 8월 31일∼9월 2일 폭우로 망원동 450번지 일대의 망원유수지 수문(水門)이 무너졌고, 역류한 강물이 망원동과 성산1동, 서교동, 동교동, 합정동, 연남동 일대를 휩쓴 사고였다. 5천여 가구가 침수되고 주민 2만여 명이 긴급 대피했다. 고(故) 조영래(1947∼1990) 변호사가 주민 22명을 원고로 내세워 서울시와 수문 시공업체(현대건설)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시가 "망원동 수해는 예측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라고 주장한 반면, 조 변호사는 "1972년 망원동 수해 때보다 수위가 낮았는데도 유수지가 파손된 것은 수문 설치와 보존에 하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맞섰다. 원고 측 요청을 재판부가 받아들여 고인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전문가 감정의 쟁점은 수문이 제대로 설치됐는지 여부였다. 서울시는 1972년 수해 후 1973년께 망원유수지를 만들면서 평소에는 배수관로로 유수지 물을 한강으로 흘려보내고, 홍수 등으로 한강 수위가 올라가면 배수관로 끝 쪽에 설치된 수문을 닫은 뒤 펌프 5대로 유수지 물을 강제토출관으로 한강에 배출했다. 문제는 1979년 '관리인 통행 불편'을 이유로 수문과 수문상자 위치를 유수지 쪽으로 옮기면서, 이전보다 작고 약하게 만들었다는 점. 다짐용 흙도 점토 대신 모래흙을 썼다. 당시 조 교수는 고인의 지시로 대학원생들과 함께 망원유수지 안에 들어가서 흙을 퍼온 뒤 점토인지, 모래흙인지 시료 분석을 맡았다.
고인은 1985년 7월 20일 재판부에 "1979년 수문 이전시 수문상자가 너무 작게 설계된 탓에 불완전한 시설물이 됐다"는 감정 결과를 제출했고, 재판부는 1987년 8월 26일 이를 토대로 원고 승소 판결을 했다. "서울시 설계대로 공사했다"는 현대건설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울시 책임만 인정한 것도 고인의 감정 결과와 일치했다.
서울시는 1심 결과가 나오기 전 고인을 회유하려고 했다. 권병덕 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은 올해 월간중앙에 쓴 글('무너진 수문, 집단소송 문 열었다')에서 "서울시는 이 교수에게 별도로 6천400만원의 용역비를 들여 서울시에 유리한 질문을 포함한 사고 원인 감정을 따로 의뢰했다. 1985년 기준으로 대치동 은마아파트 31평형이 4천만원이었으니 액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며 "그러나 서울시가 기대했던 이원환 교수마저 부실 설계 및 부실 공사라는 결론을 내려 서울시를 당혹스럽게 했다"고 했다. 조 교수는 "서울시가 여러 차례 회유하려고 한 건 맞지만 응하지 않으셨다"며 "조금만 굽히고 살았다면 큰돈을 버셨겠지만, 워낙 강골이셨다"고 말했다. 고인의 감정 결과가 불리하게 나오자 서울시 측은 대한토목학회 등에 추가 감정을 의뢰하며 지연 작전을 폈다. 재판부는 고인의 감정 결과는 모두 수용한 반면 대한토목학회 등의 감정은 일부 배척했다.
조영래 변호사는 1심 승소 후 2천390가구의 추가 소송을 제기했고, 1990년 대법원에서 승소 확정판결을 받아냈다. 450억원 청구에서 53억2천만원이 인정됐다. 한국 최초의 공익소송이자 최초의 집단소송, 최초의 기획 소송은 시민의 대승으로 끝났다. 조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 직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이 사건은 시국 사건에 국한되어 있던 인권 변호사들의 활동을 집단소송, 공익소송으로 확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조 교수는 당시 재판부가 고인에게 감정을 의뢰한 이유를 "현장을 가장 많이 아는 학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1985년) 충주댐이 완공되기 전에 (단양) 도담삼봉부터 충주댐까지 걸어가며 강바닥 사진을 찍었다. 강바닥에 천막을 치고 잤다. 나중에 댐이 들어선 뒤에 어떻게 변했는지 비교해볼 생각이었다"라고도, "자기 원칙이 강한 외골수 학자셨다. 정치색은 없었다. 숫자 기억력이 무척 좋았다. (1985년 소송 당시) 유수지 물은 똥물이었다. 그 안에 들어가서 흙을 떠 와야 하는데도 학생들이 머뭇거리면 당신이 먼저 들어가셨다"라고도 했다. 2023년까지도 제자들의 모임('수박회')에 직접 참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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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환 교수의 장례식 일정과 장소
- 유족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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